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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욱 화백은 2006년 '산과 솔과 하나님, 그리고 나'(도서출판 삼원)라는 제목을 가진 수상록을 발간했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인생 경험과 예술 정신을 후세에 넘겨 주어야 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이 글들이 힘들게 작업하는 젊은 화가들에게 한줌의 희망과 격려가 되기를 소망했다.
저자는 미술명문인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중등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작품활동을 해 왔다.
책의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저자의 그림은 산과 소나무에 대한 관조,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이라는 신앙과 성찰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자신의 삶과 예술을 이 책에 진솔하게 담았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하여 양승욱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길 클릭하면 플래시북으로 만들어진 책을 보실 수 있습니다.
 
  미술비평과 비평가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6-07-12     조회 : 847  


미술비평과 비평가


작가는 많아도 예술가는 드물다는 말이 있다. 솜씨는 있어도 정신이 없는 예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잘 알다시피 미술은 정신을 표현한 물질이다. 물질 속에 작가의 정신이 담겨야 한다는 얘긴데, 그렇지 않은 작품이 오히려 많은 게 현실이다.

나도 젊은 시절에 당시에 유행하는 미술사조에 편승한 적이 있다. 수많은 전시회를 의무적으로 보고, 미술잡지나 전문서적을 닥치는 대로 보면서 현대미술의 흐름을 찾아내고, 그것을 따라하려 애썼던 것이다. 그렇게 십수 년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현대미술이 내게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음을 느꼈다. 마치 덩치가 큰 서양인의 신발을 신고 불안하게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선행 작가의 아류나 다른 작가의 들러리에 불과한 존재가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 뒤로는 전시장을 거의 찾지 않았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면 마음이 혼란해져 평정심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서다. 그리고 나의 체질에 맞는 작업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선 나란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분명 서양인과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고, 작품 또한 그런 정체성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때 내가 따라했던 양식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10, 20년이 지난 유행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들을 지켜봤던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을 식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행의 모방은 다른 양식에서도 일어난다. 젊은 작가들은 물론 나이든 작가들조차 즐겨 따라하는 설치미술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내가 젊었을 때 따라했던 양식보다 더 무분별하고 자극적이다. 전혀 창의성이 없는 작가들도 눈에 띈다. 들러리 작가들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비평가와 언론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 새로움을 예술의 최고 가치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작품들을 소개하느라 정신이 없다. 외국에서 인기를 끈 작품들이 국적이 상실된 것 같은 용어와 문장으로 도배되어 소개된다. 그중에는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도 많다. 대중의 이해가 배제된 난해한 철학적, 미학적 담론만이 무성한 글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작품들과 담론들이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재생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형태의 아류가 미술계를 장식하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의 정서를 해치는 폭력성과 선정성을 무장한 채 우리의 문화를 침략해버린다.

경력 쌓기에 급급하거나 전시 경력을 과시하듯 몇 년 동안에 수십 회의 개인전과 수백 회의 단체전을 여는 작가들도 많다. 공명심에 사로잡혀 전시 못해 걸신들린 것처럼, 설익은 과일 같은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전시회에 내놓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게걸스런 작가들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게 예술이 아니던가. 그런 진솔한 감정은 내팽개치고 그저 표피적, 감각적, 유행적 작품을 양산하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미학적 갈망과 피부에 감기는 구체적 삶의 표현이 예술이 아니던가? 훌륭한 예술작품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다시 뒤안길을 되돌아본다. 예전의 나의 아류는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최신 정보에 현혹되어 그것을 추종하려 애썼던 일들은 정보의 탓이 아니라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정보를 의도적으로 기피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정보를 보고 현혹되기 않기 위해서다. 특히 우리의 정체성과 거리가 먼 깊이 없는 새로운 것들, 의미 없는 퍼포먼스, 재미만 있는 실험과 첨단 미디어 작품들을 숫제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미술평론가는 미술과 미술 바깥의 소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글을 쉽게 써야 한다고 믿는다. 몇 번씩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글은 소통에 문제가 있는 탓에 비평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미술비평은 알 수 없는 기호와 상징, 잘못된 번역 같은 이상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평론가가 쓴 작품에 대한 비평문은 현장에 가서 보지 않고, 사진만 보고 쓰인 경우가 많아 가끔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현장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작품의 내밀한 면까지 언급할 수 있을까?

비평은 현장을 반영해야 한다. 현장이 아닌 연구실에서 작품 사진과 자료만 보고 하는 비평은 진정한 비평으로 보기 힘들다. 비평은 논리적, 해석학적 접근 이전에 체험적이고 지각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비평문은 내용은 전문적이되 기술은 고등학생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워야 한다. 그래야 일반인들의 미술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고, 그에 따라 미술에 대한 애호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미술의 대중화와 생활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미술인의 갈망이기도 하다.

나는 인위적이 아닌, 가슴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쓴 글이나 비평과 평론가를 만나고 싶고, 감동이 서린 글을 읽고 싶다.